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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의 대한 단상 가톨릭 성경통독반을 마무리해가며

매트릭스 2023. 12. 6. 16:51


가톡릭 성경 통독반

올해 2023년 2월 27 일에 시작했다.
프로열정러인 신부님 덕분에 이 긴 시간을 헤쳐올 수 있었다. 창세기에서 보통은 고꾸라져 성경 읽기를 그만두는 게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책을 좀 읽는다고 했으나 정말 살수록 느끼지만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이라도 인지하고 있음이 다행이다 싶을 만큼 세상의 지혜는 많고 많다. 그것을 인지하기까지의 상당한 어려움이 있고 깨달았다는 말조차도 오류와 모순이 가득함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독서 중에 필독서라는 성경책에 대한 '한'을 풀어보고자 성경통독반을 신청해 가열하게 시작했지만 예상대로 그 열정은 짜게 식었다. 물론 모임에서 옹기종기 앉아 피도 안나눈 사람끼리 자매님, 형제님 하며 오글거리는 칭호를 쓰고, 서로들 인상 깊은 성경구절을 나누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으며 역시 진리서구나 느끼게도 되었다.

그런데


어떤 작은 트러블로 성경반에 나가기가 겁이 났고 그 후로는 성경공부가 아닌 그 사람의 흠을 잡을만한 구절이 있나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상대도 초반에 그랬는데 나도 그러고 있음을 소스라치게 느꼈다. 남 욕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쨌든 좌충우돌,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벌써 겨울.. 성경통독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동안 성경을 대충 읽은 적도 있고, 몇 주 동안 밀려있는 숙제를 한꺼번에 하느라 허덕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날 예수쟁이라고 비웃던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나약해빠져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한테 매달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꼬락서니도 보기 싫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종교인들이 두루두루 바로 곁에 있어 한몫하기도 했다.  그러한 종교인들을 싫어하고 한심하게 바라봤다.

기독교인에 안수집사까지 하시는 큰오빠는 나더라 성모교 다닌다고 비상식적인 사람 취급을 했다.

머리까지 삭발하고 작은 암자 비슷하게 절간으로 집을 짓고 목탁을 두드리던 남편의 어머니는 또 어떠했던가. 승용차에서조차 가부좌 틀고 계신 시어머니.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부처님 비슷한 절복과 자기만 챙기는 현실의 시어머님은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종교인을 역겹게 바라보게 되었다.

돈에 흥청망청, 신용불량자에 홈쇼핑의 물건은 언제나 먼저 집 앞에, 또는 창고 같은 방에 차곡차곡 아니 엉망진창 쌓아놓던, 늘 오빠 탓, 남탓하는 새언니가 끝내는 나와 절교를 선언하고 지금은 교회 가서 어떤 기도를 할까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나의 결혼축의금, 즉 시누이 축의금에 이어 결혼후  친정 어머니 앞으로 들어온 남편 회사의 부조금까지 싹 다 챙기는 클라쓰는?

그럼에도 신용불량자에 곧 죽어도 빚을 내서라도 사고 싶은 건 사야 하는 그럼에도 희얀하게 당당한 그녀의 자세가 신비로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욕심이 치덕치덕 볼에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노예처럼 부려먹던 남편의 남동생, 즉 나의 작은오빠의 청약할 돈까지 자기 아이들 책전집 사준다고  써대 놓고 그런 형수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내게 와 하소연하는 작은오빠. 그를 멍청이라고 쥐어박아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내가 나서서 진상을 요구하자 네가 이 집에 불란 거리라며 나가 살라던 큰오빠.  원래부터 나가 살려고 해도 아픈 어머니를 돌봐줄 보호사로 강제로 자기 집에 데려오던 사람이 뻑하면 나가 살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도 노예근성인지 그런 사람들과 마음으로 절교하지 못하고 퍽이나 그리워하고 있는 꼬락서니도 나 스스로가 밉고 싫었다.



그래서 종교인이
싫었다는 말을 tmi 하고 있는 것.


그런 내가 소위 말하는 예수쟁이가 될 위기? 에 처해있다. 알량한 매일 미사책, 그 후로는 폰에 가톨릭앱을 깔아서 달랑달랑 들고 다녔는데 스스로도 그 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무렵, 성당 입성 7년 만에 성경책을 제대로 편 것이다.

물론 성경책이 너무 크고 무거워 앱으로 열심히 읽고 있다만, 느낌은 종이책이 더 고귀하고 뭔가 있어 보인다. 자세가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나서 깨달은 점이라면 내가 잘못 해석한 성경 또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예수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지만 그를 신이 아닌 전지적 인간의 시점에서 봐도 대단한 성인임은 틀림없다는 것이다.

팩트체크라고 해야 할까? 이제껏 나는 잘못 봤다. 신을 믿기로 한 후  예수쟁이들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내가 아쉽고 세상으로부터  나락으로  떨어지다보니 째째하고 치졸하게 신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왜 그곳에서 신이 아닌 사람을 보는가. 그곳에 오는 인간들이 다 병환이 깊은 환자일 뿐인데 그분들 안에서 왜 신을 찾았던 것인가.


깨달은 점


그게 크게 깨달은 점이다. 신은 내 안에 있고 나 스스로가 신이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맘 편하자고 믿는 신이다.

그러고 나서  성경을  읽으며 그분이 했던 일들에 대해 오밀조밀하게 알게 되었다. 추상적이었던 그분이 실체를, 윤곽을 조금씩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어차피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는 것은 나의 무리한 요구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분도 억울하고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지만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다.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내가 니들에게 보여준 기적,  치료,  사랑 등을 잊어버렸냐고 원망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가끔 미사 때 십자가 고상을 올려다본다. 손등에, 모아진 발등에 박힌 굵디굵은 저 대못을 바라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분의 가르침이 왜 위대한지 새삼 탄복하게 된다.